한국 IMF의 개요!
1997년부터 아시아 지역을 중심으로 발생했던 외환 유동성 위기를 통칭하는 말.
외환 위기 사태 발생 직전까지 문민정부의 금융 정책으로 인해 각 기업들은 무분별한 차입에 의존하며 무분별한 과잉투자를 벌였다. 동시에 국외적으로는 태국의 고정환율제 포기로 인해 환율을 이용한 외국 자본의 차익 실현으로 동남아시아에 통화 위기가 발생하였고 동북아시아를 거쳐 세계 경제에 불안을 가져왔다. 이러한 경제 불안은 한국뿐만 아니라 아시아 전체에 경제 위기를 불러왔다.
한국에서는 단순히 IMF, 외환위기 등으로 지칭하는 경우가 많지만 세계적으로는 1997년 아시아 금융 위기(1997 Asia Financial Crisis)로 불린다. 이 시기에 한국만 위기를 겪은 게 아니라 아시아 전반에 파급효과를 일으켰기 때문. 인도네시아와 태국이 타격을 가장 많이 받은 국가였고 홍콩, 북한, 라오스, 말레이시아, 한국, 필리핀, 몽골, 캄보디아, 마카오 등도 침체에 시달렸다. 브루나이, 중국, 싱가포르, 대만, 베트남 또한 어려움을 겪었지만 그나마 영향을 덜 받았다. 그리고 당시 세계 2위 경제대국이었던 일본에도 영향을 주었을 정도로 파급력이 엄청나게 큰 사건이다.
일본은 90년대 첫 새해부터 이미 침체에 들어가 있었기에 영향은 아주 크지 않았지만 1995년을 기점으로 조금이나마 회복세에 접어든 경제성장률에도 불구하고 소비세를 5%로 인상하면서 소비 심리가 급속히 위축되었고 금융회사들도 잇따라 도산하는 사태가 발생하여 경제 회복에 대한 기대감은 확 꺾여 버리고 말았다. 결국 일본은 1998년도에 마이너스 성장률을 기록하고 잃어버린 10년 초-중기에 미약하게 증가했던 실질 임금과 가처분 소득도 1997년에 고점을 찍고 다시 하락세로 들어서게 되면서 경기 침체를 연장하게 되었다. 따라서 이 금융 위기는 경기 불황에서 다시 일어서려던 일본을 끌어내리는 데 한몫했다는 점에서 여파가 크다고 할 수 있으며 장기간의 불황이 넷 우익, 일본의 우경화의 간접적인 요인이 된다고 볼 수 있다.
이러한 아시아 금융위기 속에서 무분별한 차입으로 의존하던 한국 기업의 외국자본 단기부채 만료와 아시아 경제에 불안감을 느낀 외국 자본의 급격한 유출이 발생하면서 외환 보유고가 바닥나게 되었고, 충격을 극복할 수 없을 정도로 단기간에 기업의 파산이나 부도, 대량 실직이 일어나게 되었다. 또 경제 위기로 인하여 단기부채의 연장도 이루어지지 않았고 상환을 독촉받았다. 한국은 이러한 충격을 극복하기 위해 IMF에 구제금융을 요청하였는데 해당 문서는 이를 상환한 일련의 과정을 말한다. IMF는 1997년 말에 발생하여 2001년 8월까지 약 4년간 지속되었으며 이후에도 ‘IMF 사태 이후로 힘든 시기’나 ‘IMF보다 힘든 시기’ 같은 표현으로 경제적 고난을 상징하는 대명사로 자리잡게 되었다.
외환 위기 직전이 호황으로 여겨지지만 위기 조짐은 전년인 1996년부터 보였다. 1996년의 경제성장률이 1995년도의 9.6%에서 7.9%로 떨어졌던 것이 그 단초였고 언론에서는 경기 침체 및 전망에 대한 우려를 잇따라 보도하고 있었다. 즉, 이미 이전부터 불황 조짐이 서서히 드러나고 있었다.
사실 당대에도 경제성장률 7% 정도면 전혀 낮지 않은 평균 정도는 되는 수준이었기에 경기 침체로 경고했던 언론의 부채질은 호들갑 수준이라고 봐도 되었다. 1994년과 1995년도의 경제성장률이 9%대를 잇따라 기록할 정도로 활황이었기에 성장률이 떨어진 것 자체는 큰 문제가 아니었지만 문제는 이번에는 성장률 감소가 수출액 감소, 대외 채무 폭증 등과 맞물려 있었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정부와 기업들은 구조 개선 노력을 하지 않았고 결국 외환 위기를 초래했다.
당시 대한민국에서 손가락 안에 꼽히는 대기업과 은행마저도 나날이 무너지면서 대규모 실업 - 대량의 부동산 매각 - 금융 불안 등이 일어나게 되었고, 외환 위기 상황으로 확실화된 이후에야 IMF의 계획에 따라 전방위적인 경제적 체질 개선과 대규모의 구조조정이 실행되었다.
이는 사실상 대한민국에서 최초로 일어난 경제위기 사태다. 대한민국의 GDP와 1인당 GDP는 사태 직전까지 감소한 적이 없었으며 국가에서 경제위기 상황을 인정한 적도 없었다. 오일 쇼크때 잠시 경제가 안 좋아진 적이 있었지만 경제에 심한 타격은 주지 않았다. 그래서 1997년 외환위기 사태는 국민들에게 엄청난 충격을 안겨다 주며, 진짜 경제위기가 무엇인지 알려주었다. 현재 많은 사람들이 “경제위기” 하면 이때의 모습을 많이 떠올린다. 또 국민들의 경제에 대한 믿음도 완전히 바꿔 놓았는데 한 예로 ‘평생 직장’이라는 개념도 사실 외환위기 이전의 경직된 노동시장에서나 통했던 말이 되었을 정도로 대한민국 경제 구조에 큰 영향을 끼쳤다. 고용 시장이 불안정해진 이래 대한민국 사회는 25년이 넘게 지난 현재까지 그 후유증을 극복하지 못하고 있다.
2008년~2010년대 대침체의 근본적 원인이라고 생각하는 경제학자들도 있고[9] 수많은 업적을 남겼던 김영삼 대통령의 문민정부가 사고 공화국으로 불릴 정도의 수많은 사건사고와 더불어 현재도 저평가받는 주 원인이기도 하다.
IMF 란?
한국에서는 IMF를 경제위기의 대명사처럼 사용하고 있다. 경제 성장률이 떨어지거나 실업률이 상승했을 때와 같은 경제 상황은 물론, 고령화와 저출산 등 사회문제를 경제와 연관시킬 때조차 IMF라는 단어를 활용하기도 한다. ‘IMF 사태’, ‘제2의 IMF’ 등의 표현이 널리 쓰이고 있듯이, 한국에서는 IMF라는 단어 자체를 경제위기라는 단어로서 사용하고 있음을 잘 보여준다.
그러나 IMF는 경제위기를 뜻하는 영어의 약자가 아니다. IMF는 국제통화기금(International Monetary Fund)의 줄임말이다. 1944년에 체결된 브레튼우즈 협정에 따라 1945년에 설립되어, 1947년 3월부터 세계은행(International Bank for Reconstruction and Development, IBRD)과 함께 업무를 개시한 국제금융기구가 바로 IMF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날 무렵인 1944년 미국의 휴양지인 브레튼우즈에서 미국, 영국 등 제2차 세계대전 승전국의 경제학자와 정책담당자가 모였다. 여기서 전쟁 후의 새로운 세계금융질서로 미국 화폐인 달러를 기준으로 한 고정환율제가 논의되었고, 이 질서를 유지하기 위한 기구로 IMF 창설이 논의되었다. 1970년대 전 세계적으로 고정환율제를 포기하고 변동환율제를 채택했기 때문에 현재는 환율이 시시각각 변화하고 있다. 그러나 미국의 달러화를 세계의 기축통화로 삼는 것은 여전히 강력한 힘을 발휘하고 있다. 이처럼 1944년의 논의를 통해 만들어진 세계금융질서를 협상 장소의 이름을 따서 ‘브레튼우즈 체제’라고 부른다. 브레튼우즈 체제는 제2차 세계대전과 함께 형성된 냉전체제 하에서 자본주의 국가들이 사회주의 국가들을 경계하면서, 동시에 자본주의 국가들 간의 경쟁이 전쟁으로 확대되는 것을 방지하면서 함께 번영할 방법을 찾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었다.
그렇기에 브레튼우즈 체제 하에서 창설된 IMF는 자본주의적 경제 발전의 확산과 유지를 위해 움직인다. IMF는 자금을 빌려주는 역할을 하기에 일반 은행과 비슷하다고도 생각할 수 있지만, 단순히 자금을 빌려주는 것에만 그치지 않는다. IMF는 자금을 빌리는 나라와 협의하여 그 나라의 경제 정책에 개입한다. 이 과정에서 자금을 빌리는 나라들은 자본주의 시장에 깊숙이 발을 들이게 된다.
이처럼 IMF는 미국이 큰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으며, 금융위기 해결사를 자처하는 국제기구인 셈이다. 2021년 기준 총 190개의 나라가 회원국으로 가입되어 있으며, 한국은 1955년에 가입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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