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계 기업 부도 상황.
재계 14위 한보그룹
한보그룹 정태수 회장은 철강 사업에 뛰어들기 위해 한보철강을 설립하였으나 당진제철소를 지을 돈이 없어 김영삼의 차남 김현철 등 정계 유력인사들에게 뇌물을 주어 약 5조원의 불법 대출을 받았다. 그러나 정태수는 이 돈의 대다수를 다른 사업에 투자하는 등의 행위를 하다 결국 덜미가 잡혀 5조 원의 빚을 떠안고 당진제철소가 부도 처리되었고 이 여파로 한보철강과 한보그룹도 줄줄이 부도되었다.
재계 14위 대기업이 갑자기 5조 원 규모의 빚을 지고 부도나자 이 여파로 금융권의 자금경색을 초래했다. 이후 부채비율이 과중했던 주요 대기업들이 대출 상환에 어려움을 겪게 되면서 대한민국의 경제가 나락으로 치달았고 이에 삼미그룹, 진로그룹, 대농그룹, 한신공영, 기아그룹, 쌍방울그룹, 뉴코아그룹을 비롯한 다른 기업들도 줄줄이 부도가 나면서 1997년 외환 위기의 방아쇠를 당겼다고 평가받는 사건이다.
한보그룹이 부도가 나면서 발생한 추악한 경제범죄 사건으로 정태수 회장이 김영삼의 차남 김현철 등 정계 유력인사에게 뇌물을 준 사건이다. 이렇게 해서 생긴 불법대출액은 5조 7,000억 원이다. ( 연도별 정부재정규모 통계를 보면 1997년 정부재정이 100.3조 원으로 나온다. 즉 당시 정부재정의 약 5.7%에 이르는 수치다. 2020년대의 물가로 환산하면 최소 20~30조 정도는 된다.)
수서 비리 사건으로 이미 풍전등화의 처지에 놓였던 한보그룹은 정태수 총회장의 욕심에 의해 철강 사업에도 마수를 뻗치게 되었다. 그러나 열악한 자금 조달 상황에서 필요한 것은 은행의 차관. 당시 은행들은 철저히 독립된 지금과 다르게 정부와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었고 은행을 통해 자금 조달을 하기 위해서는 정부와 손을 잡아야만 했다. 이에 정태수는 은행가에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정치인들 위주로 대형 로비를 벌였된다.
정태수는 국회 출석 자리에서 1조 원을 빌려 제철소를 짓는다면 자신이 10조 가치의 공장을 만들어 주겠다며 호언장담했고 이는 TV에도 그대로 전파를 탔다. 그러나 그 계획은 시간이 지날수록 금액이 불어나 결국 5조 원대의 계획으로까지 번졌다. 한보는 정부의 비호 아래에서 대출받은 금액을 가지고 제철소를 만들었지만, 대출을 받음과 동시에 문어발식으로 인수합병 및 세력확장을 호전적으로 진행해 자금이 들어와도 메꿀 수 없는 처지에 놓였다.
결국 정태수는 꼬리가 잡혀 1997년 5월 재판을 받고 수감되었고 실제 감사 결과 차관 5조 7,000억원 중 2,000억원만 사용된 사실이 드러나 그의 행적에 의문을 품지 않을 수 없었다. 당시 지어졌던 한보철강 당진제철소는 바로 부도처리 되어 포항종합제철이 위탁운영하기에 이르렀다. 당진제철소와 거래를 놓은 백수십여 개의 기업이 줄줄이 도산했다. 당진시(당시 당진군)의 경제는 당연히 불황을 넘어서 붕괴 수준에 빠졌다.
결국 모기업 (주)한보는 2002년 진흥기업과 일본 야마토공업에 분할매각되어 한보건설 및 YK스틸로 분사됐고 한보철강공업은 포항제철 위탁경영, 법정관리를 두루 받다가 2000년 네이버스 컨소시엄, 2003년 AK캐피탈컨소시엄이 각각 사들이려 했으나 무산되었고 2004년에 INI스틸과 현대하이스코 컨소시엄이 인수하였다. 현대그룹은 현대자동차, 현대중공업 등에서 소모하는 고품질의 철강물량이 많기 때문에 1977년부터 자체 제철소를 가지고 싶어했지만 포항제철을 밀어주는 정부에 의해 허가를 받지 못한 상태였기에 매각 초기부터 유력 인수후보자로 점쳐지고 있었고 처음에 몇 번 튕기다가 인수하였다. 다만 당진제철소의 설비들은 완공되어 가동중인 것보다는 건설 중단된 것들이 많았는데 전기로ㆍ냉연설비는 인수자 측에서 완공하여 가동에 들어갔지만 제철소의 핵심인 용광로는 한보철강에서 신기술을 도입한다며 코렉스장비를 도입하였으나 도입 초기부터 대량생산체제에 적합하지않은 비효율적인 장비라고 비판받았고 인수자 측에서 공정률 90%인 설비를 완공하지 않고 뜯어서 인도 제철기업에 매각하고 2010년 즈음이 돼서야 고로를 새로 설치했다.
재계 26위 삼미그룹
삼미그룹의 뿌리는 김두식(1925~1980) 창업주가 21세 되던 1946년에 세운 비누/식용유 제조공장이었다. 1950년 6.25 전쟁으로 부산으로 피난가 우지와 화공약품을 만들다가 휴전 후 1954년, 서울 청량리에 목재 가공업체 '대일기업'을 세워 그룹의 시작을 알렸다. 1959년 인천 만석동에 '대일목재공업'을 세우고 1960년 '삼미사'를 세워 무역업에까지 확장해 박하, 건어물, 수산물 등을 해외에 수출했으며, 합판 수출 증가로 일약 대형 무역업체로 급상승했다. 뒤이어 원목 수출을 위해 삼창해운을 인수해 해운업에도 뛰어들었고, 1967년 삼양특수강 및 삼미광업개발을 인수한 후 1970년에 막 완공된 삼일빌딩으로 본사를 이전했고, 1974년 한국종합특수강도 인수하고 1976년엔 삼미문화재단을 세웠다.
1980년 김두식 회장이 골수암 투병 3년만에 55세로 세상을 등지자, 장남 김현철이 30세의 나이로 가업을 이었다. 1982년 인천 연고의 프로야구단 '삼미 슈퍼스타즈'를 창단하고 한국단조, 삼미전산 등을 세우는가 하면, 같은 해에 유나 및 대명조선도 인수해 사업 다각화를 이룩했다. 그러나 제2차 오일 쇼크로 이미 해운 및 목재업에 타격을 입었고, 이에 따라 경영이 악화되어 삼미 슈퍼스타즈를 청보식품에, 삼일빌딩을 한국산업은행에, 삼미해운을 범양상선에 각각 팔아버렸다. 이후 김현철 회장은 본사를 서초구 방배동으로 옮기고 그룹을 특수강 중심 전문화로 방향을 틀어 1987년 삼미정공, 1988년 삼미이튼, 삼미켄하, 삼미화인세라믹스, 1989년 삼미전자 및 삼미아구스타항공 등을 각각 세우는 한편, 1989년엔 캐나다 아틀라스 및 미국 알텍 사도 인수했다.
1990년대 들어 특수강 경기가 부진해지자 계열사를 5개로 줄이려고 했으며 1996년엔 삼미종합특수강 일부 공장설비를 포항종합제철에 파는 등 구조 조정을 꾀했다. 그러나 1995년 노태우 비자금 사건이란 악재를 맞고, 1997년 외환 위기로 부도 처리되어 해체 수순을 밟았다.
한편 김현철은 경기 부진으로 1995년 회장에서 물러나고 동생 김현배에게 자리를 물려줬으나 결국 해체를 막지 못했다. 이후 그는 도미니카에서 선교사로 살고 있다.
1. 1997년 3월 19일 삼미특수강 부도
삼미특수강은 1966년 4월 7일 설립된 (주)삼양특수강으로부터 출발하였으며 1967년 삼미그룹이 삼양특수강을 인수하였고, 김두식 회장이 70년대 초반 창원기계공업단지에 특수강 생산 공장인 창원제강소를 건설하여 중화학공업육성시책에 따라 지속 성장하였으며, 김두식 회장의 별세와 제2차 오일쇼크로 위기를 맞았으나 새롭게 삼미그룹 총수에 오른 김현철 회장이 적자투성이 특수강을 주력업종으로 키웠고 1980년대 자동차산업의 호황으로 제2의 전성기를 맞게 되었다.
1985년~1986년에 창원공장 증설 및 설비투자에 3천억을 투입하고 1989년에 캐나다의 아틀라스와 미국 알텍을 인수하였으나 1992년 특수강 경기불황으로 북미공장 4년 연속 적자가 발생하여 삼미그룹과 채권은행단이 1997년 3월 18일 (주)삼미와 삼미특수강 2개사에 대한 법정관리를 신청하였으나 1995년 유원건설과 1997년 한보그룹의 부도로 인해 부실이 심화된 주거래은행인 제일은행이 대출금 회수전망 불투명을 이유로 추가 지원 대출을 거부하여 1997년 3월 19일 동남은행 삼성동지점에 돌아온 삼미특수강의 어음 8억여원을 결제하지 못해 최종 부도처리 되었다.
2. 삼미특수강 매각을 통한 경영정상화
1997.03.24 회사재산보전처분 결정, 1997.12.04 회사정리절차개시 결정에 따라 삼미특수강이 1998.05.18 회사정리계획안을 제출하였고 이를 바탕으로 1998.12.17 회사정리계획안이 인가결정(1999~2008)됨에 따라 매각이 시작되었고, 1997.03.03 본강 및 강관 사업부문을 창원특수강에 매각함에 따라 스테인레스강판 사업부문만이 남게 되었으나 철강경기의 호황으로 공장가동율 및 매출액이 크게 증가함에 따라 삼미특수강 인수를 원하는 국내외 기업이 늘어났기 때문에 매각절차는 순조롭고 빠르게 진행되었다.
1999.08.25 인수제안서를 접수하고 1999.10.26 상세실태조사 대상자를 선정하여 1999.11.20 최종인수제안서를 접수하고 1999.12.20 인천제철(현재 현대제철)을 우선협상대상자로 동부제강 주식회사를 예비협상대상자로 선정하였고, 2000.03.15 최종제안서가 제출됨에 따라 2000.05.04 국제입찰에 의거 인천제철과 기업인수를 위한 본 계약이 체결되었고, 2000.09.14 공정거래위원회가 인천제철과 삼미특수강의 기업결합을 승인하고 2000.12.06 인천제철이 삼미특수강 인수를 완료함에 따라 2001.03.23 삼미특수강의 회사정리와 경영정상화를 위한 조치가 완료되었다.
3. 삼미특수강 본강 및 강관 사업부문의 매각관련 소송
1997년 3월 5일 삼미특수강의 본강 및 강관 사업부문이 창원특수강(포항제철) 매각과 관련되어 삼미특수강 포괄양도여부에 대한 소송이 진행되었고 2002년 9월 11일 서울고등법원이 창원특수강이 실질적으로 삼미특수강으로부터 봉강, 강관 사업부문의 영업상 인적, 물적 조직을 포괄적으로 이전받음으로써 영업을 양도받은 것으로 보기 힘들다고 판결함에 따라 삼미특수강노동조합이 고용승계를 주장하며 제기한 소송 역시 마무리되었다.
서울고등법원은 2002년 9월 11일 1)원고가 삼미로부터 인수한 자산은 부동산 및 동산뿐만 아니라 산업재산권과 제품매뉴얼까지 포함하여 거기에 인적 자산만 결합하면 곧바로 삼미와 동일한 제품을 생산할 수 있는 점, 원고에 의하여 채용된 인원이 삼미 요청 인원의 75.6%에 달하고, 원고에 채용된 삼미 직원들이 삼미를 퇴직하고 나서 원고에 의하여 신규채용된 것이 아니라 신규 채용되고 나서 삼미를 퇴직하였으며, 원고 채용 직원 중 공장을 운영하기 위한 기능직 비율이 월등히 높은 점, 삼미출신 직원들에 대하여는 수습 기간 중에도 인사, 급여 및 후생제도에서 정규직원과 동일한 점, 만일 이와 같이 자산양도 방식으로 사업을 폐지할 경우에는 삼미 노동조합의 단체협약상 합의에 관한 권한과 근로자들의 회사 재산에 의하여 담보되는 퇴직금 등 임금채권의 우선변제권이 침해될 우려가 있었고, 이로 인하여 삼미노동조합이 이 사건 계약의 체결과 관련하여 고용승계를 주장하며 크게 반발하였던 점 2)원고가 이 사건 계약 후 얼마 지나지 않은 1997. 4. 1부터 인수한 물적 자산에 삼미로부터 채용한 근로자들을 투입하여 특수강을 생산하고 있는 점 등의 사정을 고려한다 하더라도, 이 사건 계약은 원고가 실질적으로 삼미로부터 봉강ㆍ강관 사업부문의 영업상 인적ㆍ물적 조직을 그 동일성을 유지하면서 일체로서 포괄적으로 이전받음으로써 영업을 양도받은 것으로 보기 힘들고, 이 사건 계약의 내용과 같이 이 사건 공장의 자산만을 인수한 것으로 봄이 상당하다고 판결하였다.
'취미 > 돈 과 사건' 카테고리의 다른 글
돈의 사건 (한국 IMF) 5. (85) | 2024.07.19 |
---|---|
돈의 사건 (한국 IMF) 4. (101) | 2024.07.17 |
돈의사건 (엘론사태) (83) | 2024.07.12 |
돈의 사건 (한국 IMF) 2. (111) | 2024.07.09 |
돈의 사건 (한국 IMF) 1. (53) | 2024.07.0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