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계 기업 부도 상황.
재개 4위 기아그룹
기아그룹의 모태는 1944년에 창업주 학산(鶴山) 김철호가 세운 자전거 부품 생산업체 '경성정공'이다. 1952년에 '기아산업'으로 사명을 바꾸어 최초의 국산 자전거 '3000리호'를 만들었고 1959년부터 일본 혼다와 도요공업(現 마쓰다) 등과 기술 제휴를 맺어 1961년에 '기아마스타'란 상표명으로 오토바이 'C-100'을 만들어 이륜차 사업으로 확장했다. 1962년부터는 삼륜트럭 'K-360'을 만들어 자동차 산업에 진출했다.
1970년에는 '기아써비스'를 세워 사업 확장을 시작해 1973년에 썬공업과 동우정기를 인수해 '한국금형'과 '기아정기'로 각각 사명을 변경하였고, 1976년에 동국제강 계열이던 아시아자동차를 인수하고 삼원제작소를 설립하였고, 1978년에는 남영금형공업을, 1986년에는 대한중기공업을 각각 인수했고, 같은 해 여의도 거산빌딩을 사서 사옥으로 쓰기 시작했다.
1989년 종합조정실을 발족해 그룹의 모양새를 갖추어 1990년대 들어 건설업과 금융업에까지 진출해 그 세를 불려나가 일약 재계 순위 10위권에 올랐다.
기아그룹은 1997년 기아차를 중심으로 기아중공업, 기아전자, 기아정기, 기아특수강, 기산 등의 28개 계열사에 직원 5만 5천 명, 1996년 자동차 수출 30억 달러, 재계 순위 8위의 거대 그룹이 되었다. 특히 다른 그룹들과 달리 특정 일가의 소유가 아닌 소유 분산이 잘 이루어져 있고 전문경영인 체제가 잘 갖추어져 있는 모범 기업으로 인정받았다. 하지만 이러한 소유 구조 때문에 강력한 재벌들 사이에서 매우 불안한 모습을 자주 보였다. 1993년 자동차 산업 진출을 노리던 삼성그룹이 대량 주식 매입에 나서면서 삼성그룹과 기아그룹이 충돌하기도 했다. 여론의 비판을 받은 삼성이 지분 일부를 다시 매각하지만 삼성의 기아자동차 인수설은 끊임없이 제기된다.
이후 기아는 국제 경쟁의 격화와 경기 침체, 계열사의 부실한 경영 실적 등으로 1997년 봄부터 위기설에 휩싸이다가 결국 1997년 7월 15일 부도유예협약 적용 대상이 된다. 이후 28개 계열사를 14개로 줄이고, 기아차노조가 무분규, 임금 동결 선언을 하는 등 자구책을 마련했으나 결국 10월 법정관리로 넘어가고 김선홍 회장 등 경영진은 완전 퇴진하게 된다. 외환위기의 혼란 속에 여러가지 시나리오가 제시되지만 결국 1998년 10월 국제 입찰을 통해서 1999년 현대그룹의 현대자동차에 매각된다.
기아그룹 부도의 원인으론 크게 두 가지가 거론된다.
첫 번째는 잘못된 수요 예측을 바탕으로 한 무리한 사업 확장. 기아그룹은 1990년대 아시아자동차, 기아특수강, 기산(건설, 부동산 개발) 등에 전폭적인 투자를 했으나 아시아차의 트럭과 기아특수강의 철강은 수요 예측이 잘못해 만성적인 공급 과잉이었고, 주택 건설에 뛰어든 기아산업은 부동산 경기 침체로 인한 악성 미분양으로 엄청난 자금이 묶이고 말았다. 이 3개 계열사의 적자 때문에 기아의 부채가 눈덩이처럼 커졌다는 것.생사 갈림길 선 기아그룹 패인 분석
두 번째는 문민정부의 기아 부도 사태에 대한 대응이다. 당시 재계 8위의 기아그룹이 부도가 나면서 정치권과 여야가 기아그룹 처리 문제로 격한 갈등을 빚었고 임기 말의 문민정부는 이에 대한 명확한 수습책조차 내놓지 못하고 있었다. 당시 은행장들의 증언에 따르면 기아의 나눠 먹기식 경영 행태를 지적하며 기아 내부의 경영 실패를 비판했고 재경부의 고위 간부는 당시 강경식 경제부총리가 김선홍 회장을 강제 사퇴시킴으로써 기아 사태에 잘못된 대응을 했다고 비판했으며 정치권과 정부 내부에서의 정리되지 못한 중구난방식의 잘못된 대응이 기아 부도 사태를 심화시켰다고 1998년 9월 7일자 경향신문에서 밝혔다.
세 번째는 삼성의 무리한 적대적 인수 추진과 갑작스러운 자금 경색에 따른 일시적 위기를 극복하지 못했다는 의견도 있는데, 기아그룹이 자금난 등으로 계열사 적자에 시달리다 1997년 3월 삼미그룹 부도로 인한 금융 시장의 경색에 유탄을 맞은 것뿐이라는 주장이다. 하지만 당시 재벌 중에는 부채 비율 1000% 재계 순위 10위의 한라 등 기아보다 재정 상태가 엉망인 곳도 많았다. 더구나 기아그룹의 주축이자 주력사인 기아차는 흑자를 내고 있었기 때문에 부실한 계열사 몇 개만 정리하면 충분히 자력 회생이 가능했다는 주장이 당시 기아 임직원들 사이에선 끊임없이 나오고 있다.
때문에 당시에도 일명 ‘삼성음모론’이 돌았지만 당시엔 물증은 없어 흐지부지됐는데, 나중에 ‘삼성 X파일 사건’을 통해 기아차 매각 앞뒤로 유동성 위기에 처한 기아차 쪽에 금융권이 추가 지원을 하지 않도록 삼성이 정치권을 대상으로 로비를 벌인 정황이 실제로 드러나 삼성이 기아를 부도냈다는 음모론이 사실로 밝혀졌다. 삼성이 삼성생명과 제2 금융권을 통해 기아의 자금 경색을 유도하고 정부를 압박해 기아 경영진 퇴진을 이끌어 냈다는 것. 이후에 기아차를 인수하려 했으나, IMF 사태 직후 삼성 역시 경영난으로 자동차 산업 철수를 결정하면서 인수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실제 삼성은 1997년 초에 ‘기아차 성장 한계 봉착’ ‘자동차 업계 대대적인 구조조정 필요’ 등의 보고서를 공개해서 기아를 흔들기도 했다. 삼성자동차 보고서 파문 부도유예협약 직후인 8월에는 ‘쌍용, 기아차 인수가 필요하다’라는 삼성 내부 보고서가 유출되기도 했다. 1999년 외환위기 청문회 당시 김선홍 회장은 “삼성이 이를 바탕으로 금융 계열사 등을 통해 빌려줬던 5000억 원대의 자금을 거둬들였고, 결국 기아가 파산에 봉착했다”라면서 음모론을 제기했다.
이에 대해 몇 가지 추가 이야기가 있는데, 1995년 당시 삼성중공업 직원들이 기아차 소하리 공장 출고장에 세워져 있던 신차 봉고 J2의 사진을 찍다 기아차 직원들에게 걸리는 바람에 기아와 삼성 간의 알력이 발생한 바 있고(1995년 6월 17일 한겨레 기사), 1997년 3월에는 중앙일보의 취재 헬기가 기아자동차 아산만공장(現 화성공장) 상공을 선회하는 일이 있기도 했다(1997년 3월 13일 동아일보 기사). 참고로 봉고 J2 사진을 찍다 걸린 사건에 대해 삼성중공업에서는 사내 차원에서 중징계를 내리는 조치를 취했다고.
그러나 삼성이 기아를 인수하기 위해 소위 말하는 더러운 짓까지 해가며 물밑 작업을 열심히 쳤음에도 불구하고 정작 기아가 법정관리를 신청했을 때 삼성은 당시엔 기아를 인수할 여력이 없었다. 부산 신호동 매립지에 무리하게 자동차 공장을 짓느라 초기 투자 비용이 상당했고, 거기에다 국가적으로 IMF 사태까지 터지자 삼성자동차는 바로 자본잠식 상태 및 경영난으로 기아그룹과 비슷한 상태의 부도 직전 상태였던 것이다. 그렇다 보니 기아를 인수하기는커녕 기껏 세운 삼성자동차마저 다른 회사에 넘어갈 판이었다. 결국 삼성은 기아를 인수하기 위해 별의별 짓을 다 해놓고도 제 앞가림도 못해 삼성그룹 자체가 소멸할 위기에 처했고, 삼성은 그렇게나 원하던 기아자동차가 현대 손에 들어가는 걸 가만히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이후 삼성자동차는 프랑스 자동차 회사인 르노에 인수되어 르노삼성자동차(現 르노코리아)가 출범하게 된다.
당시에 기아 부도 사태가 IMF 외환위기를 불렀다는 뉴스가 1998년 9월 7일 경향신문에서 보도되었다.
부도가 나자 굉장히 특이한 상황이 발생하였는데, 회사의 실질적인 주인인 노조와 경영자가 정치로 회사의 위기를 풀어나가려 시도한 것이다. 적은 규모의 부정 혹은 부도였다면 14%의 지분율을 가지고 있던 노조가 1% 지분율의 경영자를 쫓아냈겠지만, 너무 부도의 규모가 크자 양측이 합심해서 정부를 상대로 정치적인 수단을 이용한 것이다.
재개 해태그룹
1945년 박병규, 민후식, 신덕발, 한달성 등 4명이 적산기업 나가오카(永岡)제과 용산공장을 인수해 '해태제과합명회사'를 세운 게 이 그룹의 시초이다. 1958년 해태산업을 세워 사세 확장을 시작해 1973년 해태식품을 세워 음료사업에도 진출했고, 다른 한편 농어촌개발공사로부터 한국산토리, 감귤냉장판매, 메도골드코리아까지 인수했다. 이후 1978년 해태관광, 1978년 해태상사, 1979년 신방전자, 1982년 코스코, 1986년 무궁화식품 등을 각각 인수/설립했다. 1980년대 초반까지는 거의 식품 위주로만 사업을 확장했다.
60년대를 거치며 해태제과는 엄청나게 성장했다. 특히 호남 사람들의 열렬한 애향심을 바탕으로 전라도 시장을 완전히 장악했을 뿐만 아니라 60년대 이후 호남 사람들이 대거 서울로 상경하면서 서울과 인천 등 수도권에서도 엄청난 판매량을 보였다. 당시 호남 사람들이 많이 살던 서울 변두리 지역 슈퍼 마켓에는 100% 해태제과 제품만 취급하고, 롯데, 빙그레, 크라운 등 다른 회사 과자는 아예 팔지 않는 가게도 적지 않았을 정도였다.
그런데 1977년 공동창업주 박병규가 급서하자 공동창업주들 간에 경영권 분쟁이 생겼다. 박병규의 장남 박건배 기획과장이 부친 사망 직후 상무로 긴급 승진했다. 이후 1978년 전무, 1979년 부사장을 거쳐 1981년 해태제과 등 3개사 사장이 되어 사실상 경영권을 잡았다. 반면 신덕발의 아들 신정차는 1981년에 해태관광을 들고 먼저 분가했고, 민후식의 아들 민병헌도 1988년에 해태유업을 들고 독립해 동거 시대를 끝냈다.
1981년 박건배는 회사 경영권을 완전히 장악하고 그룹회장에 취임했고, 이후 본격적으로 사업다각화에 열의를 보였다. 1981년 코래드를 세워 광고업에 진출했다. 이어 1981년 프로야구 출범 직전에 운좋게 참여하여 야구단 해태 타이거즈를 창단했다. 당시 해태는 규모가 작아 프로야구단 창단 기업 대상에 들지 못했지만 호남 연고 기업으로 야구단을 창단할 마땅한 기업이 없어 막판에 합류하게 되었다.
이듬해인 1983년에는 한국커피, 대아상호신용금고, 마진금속을 잇달아 인수하여 금융업 및 중공업에도 뛰어들었다. 마진금숙은 나중에 해태중공업으로 사명을 바꾸었다. 같은 해 계열사 자율경영체제로 전환했고, 이듬해인 1984년 회장 부속실을 '종합조정실'로 개편해 본격적인 그룹의 형태를 갖추었다.
1994년에는 당시 부의 상징이었던, 하지만 저물어가던 사양 산업이었던 오디오 사업에 뛰어들어 인켈을 인수했다. 당시 인켈이 해태를 인수했다고 착각한 사람들이 많았을 정도로 인켈의 브랜드 파워와 규모가 컸었다. 그러나 문제는 MP3의 도래로 오디오 산업이 급격히 몰락했다는 점이다. 인켈은 당시 부동의 국내 1위 오디오 제조사였지만 서서히 몰락해고 있었다. 해태는 이를 기회로 인켈을 저렴하게 인수하였다고 생각했겠지만 인켈 인수 얼마 후 오디오 산업 자체가 와해되었다.
이듬해인 1995년에는 가정용 무선전화기로 유명한 나우정밀을 인수했다.
이러한 활발한 인수합병 덕분에 해태그룹은 1996년 말 기준 재계 24위까지 올랐다.
그러나 본업과는 전혀 무관한 비식료품 사업을 무리하게 확장하는 문어발식 경영, 총수의 대외활동 편중 등이 화를 불렀다. 그의 과감한 사업 확장은 별로 안목이 좋지 않았는데 사양 산업인 오디오 산업과 휴대폰이 태동하던 시기에 사양산업인 가정용 무선전화 사업에 뛰어들었던 것이다. 물론 해태는 나우정밀을 바탕으로 휴대폰 사업에도 진출하려는 계획이 있었지만, 이미 나우정밀은 해당 분야에서도 다른 대기업 계열사들에 밀려 어려움을 겪고 있었고, 게다가 겉보기와 달리 가정용 무선전화와 장거리 무선통신은 기술적으로 완전히 다른 분야였다. 이쪽에는 이미 삼성, LG 같은 전통의 대기업은 물론이고 팬택같은 벤처 기업들이 해당 분야에 상당한 기술력을 가지고 있었다.
해태는 해당 기업들을 인수하기 위해 막대한 자금을 차입했는데, 결국 1997년 외환 위기 때 유동성 자금난을 겪게 되었고, 결국 2001년 프로야구단 해태 타이거즈와 해태제과 중국법인을 매각하면서 그룹이 완전히 해체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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