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계 기업 부도 상황.
재계 뉴코아(백화점)
한신공영의 계열사로 시작하여 현재는 이랜드리테일이 운영하는 백화점이다. 본사와 본점 모두 서울특별시 서초구 잠원동에 있다.
과거 뉴코아그룹 시절 얼룩말을 상표와 주요 이미지로 내세웠으며, 당시 신문광고에는 얼룩말 무늬의 전신 타이즈를 입은 여인을 광고 이미지로 종종 내세우기도 했다. 심지어 어떤 신문광고에서는 얼룩말 무늬 비키니 입은 여자 해당 기사 그런데 이게 얼룩말 여인 관련 유일하게 간행물 광고자료로 남은 뉴코아 광고 흔적이다.(...). 해당 동물을 상표로 쓴 건 김의철 전 회장이 말띠여서 그랬다는 얘기도 있다.
과거에는 뉴코아의 유명세 때문이었던지, 무슨 소형백화점이나 종합매장 같은 쇼핑몰의 명칭에 '~코아'가 접미사처럼 붙곤 했다. 뉴코아가 진출하지 않은 대구광역시에도 청구가 광장코아, 그린코아, 월성청구코아, 한성건설에서도 한성코아 등의 대규모 아파트 상가 쇼핑몰을 제법 지어놨다.
원래는 한신공영의 계열사로 시작했으며, 기업 자체는 1978년부터 시작되었다.
창업주 김의철은 한신공영에 입사한 평사원이었다. 입사 이후에 뛰어난 업무 능력으로 당시 한신공영의 회장이었던 김형종 회장의 눈길을 끌었고, 이후 2년만에 과장으로 승진했다. 이후에는 아예 사위가 되면서 본격적으로 경영 일선에 참여하게 되었다. 이후 본인의 최대 업적이라고 할 수 있는 강남 일대의 개발 사업에 적극적으로 뛰어들었다. 사실 1960년대까지만 하더라도 서초구와 강남구일대는 옛 광주군과 시흥군에 속했던 지역으로, 정말 말그대로 시골 촌동네였다. 물론 이때도 일대 지역의 개발 사업은 예측되었으나, 아직까지도 서울특별시의 중심은 강북 일대였다. 때문에 사내에서도 반대 의견이 상당했는데, 김의철은 신반포 한신아파트의 개발 사업을 주도했고 결과적으로 이는 신의 한 수가 되었다.
이후 1978년에는 사업 다각화 차원에서 유통업 진출을 결정했고, 한신윤교개발에서 30평 규모의 뉴코아 슈퍼마켓이라는 작은 상점을 운영하게 되는데 이게 바로 뉴코아의 모체가 된다. 이후 신반포 한신아파트를 건설하고 남은 부지를 활용하여 서울고속버스터미널 인근에 대형 쇼핑센터를 건설했다. 이 쇼핑센터 1층에 대형 슈퍼마켓을 김의철이 직접 운영했는데, 이게 다시 한 번 대박을 친다. 개점 5개월 만에 하루 평균 1,000만 원에 달하는 매출을 벌어들이는 등 흥행에 성공했기 때문이다. 이후에도 꾸준히 매출이 늘었고, 이를 바탕으로 1981년에 뉴코아는 별도의 법인으로 분리되었다. 강남구 일대 십여 대의 대형버스를 운행하여 고객들을 끌어모았고, 쇼핑센터 옆에 백화점을 신축하여 1985년에는 뉴코아백화점 신관이 개점했다.
1990년대에는 경제 성장에 발맞춘 소비 생활의 향셍에 맞추어 백화점 점포들을 대대적으로 출점하기 시작했다. 이때 박리다매 전략으로 뉴코아백화점은 국내의 주요 백화점으로 성장했다. 1993년에는 한신공영과의 분리 작업이 공식적으로 마무리되었으며, 1994년에는 대형할인점 사업에 진출하면서 회원제 할인점 킴스클럽과 일반 할인점 뉴마트를 정식 출점했다. 이후 1997년에 IMF 외환위기로 파산하기 직전까지 2개월에 1번꼴로 뉴코아백화점과 킴스클럽을 개점하며 급속하게 성장했으며, 특히 분당신도시 일대에 많은 점포를 출점했다.
1996년에는 한신공영 그룹에서 완전히 독립하였고, 그와 동시에 재계서열 30위에 들었으며, 1997년 상반기에는 25위까지 올라갔다. 하지만 탄탄한 계열사들이 그렇게 많지 않았으며, 이자율도 높던 시기에 무리하게 매장을 출점하다 보니까 막대한 부채가 쌓이기 시작했다. 이후 IMF 외환위기가 발생하자 끝내 버티지 못해 1997년 11월에 부도신청을 하고, 최종 파산했다. 그리고 한신공영도 이때 부도가 났으며, 뉴코아는 법정 관리를 받으며 일부 점포를 폐점하는 등 구조조정 단계를 밟기 시작한다.
이후 2003년에 이랜드리테일이 뉴코아를 인수하여 뉴코아라는 법인명은 사라지게 된다. 이후 이랜드리테일은 뉴코아백화점 점포들 중 대다수를 도심형아울렛으로 전환했다. 이후에는 이랜드리테일의 첫 브랜드인 2001아울렛과 함께 NC백화점으로 지금까지 명목을 이어고 있다. 다만 나름대로 고급 백화점의 대우와 인식을 받았던 전성기 시절의 위상을 생각하면, 세이브존과 함께 격세지감을 느낄 수 있다.
정부과천청사가 개발되면서 고위급 공무원들이 이주하여 경제력이 높았던 과천의 뉴코아, 안양시의 부촌으로 자리잡은 평촌신도시의 뉴코아 또한 꽤나 수준있는 구성이었다. 그리고 반포동의 본점은 서초구 일대에 별다른 백화점이 없었기 때문에, 장사가 매우 잘되었다고 한다.
국내증권업계 서열 8위인 고려증권
1959년 새한증권으로 설립되어 1967년 태창증권으로 변경되었다가 1971년 문옥주 전 동양화재 사장에게 인수되어 1974년 4월 대아증권으로 사명을 변경한 뒤 7월 동국제강이 지분 일부를 인수했다. 1977년 김봉재 중소기업중앙회장에게 소유권이 넘어갔다가 1978년 고려통상에 인수된 후 1981년 고려증권으로 사명을 변경하여 1982년 고려증권 배구단을 창단했다. 1983년 반도투자금융도 세웠다.
1986년 9월 국내 기업으로서 최초로 일본 도쿄에 지점을 낸 뒤 11월 기업공개를 단행했다. 1987년 고려종합경제연구소, 1988년 고려투자자문을 각각 세운 뒤 1989년 미국 코네티컷뮤추얼 사와 합작해 고려씨엠생명을 세워 고려통상그룹을 금융중점 기업집단으로 만드는 데 공헌했으나, 1997년 외환위기 여파로 금융기관으로서 처음 부도를 맞아 영업정지됐고, 1998년 상장폐지 후 문닫아 역사속으로 사라졌다.
내증권업계 서열 8위인 고려증권이 자금난을 견디지 못해 5일 최종부도처리됐다. 이에따라 증권감독원은 이날 저녁 증권관리위원 회를 열어 고려증권의 영업을 6일부터 1개월간 정지시켰다.
고려증권에 맡겨진 고객예탁금(3일 현재 1,192억원)은 다음주초부터증권금융을 통해 고객들에게 지급될 예정이다.또 고려증권에 개설된 증권투자 계좌는 고객이 지정하는 증권사로 이관돼 이관즉시 매매거래가 가능하다.
증권회사의 영업이 정지된 것은 지난 63년 50여개 증권사가 무더기 파산한 증권파동이후 처음이다. 고려증권은 지난 3일 교환이 돌아온 자금300억원을 결제하지 못해 1차부도를 냈으며 4일까지 한일은행 증권타운지점 808억원 등 모두 1,757억원을 막지 못해 5일 최종부도 처리됐다.정부의 영업정지조치에 따라 고려증권은 6일부터 주식위탁매매 등 모든 업무가 중단된다. 다만 영업정지 기간중에도 신용 반대매매와 선물·옵션의 미결제 약정 반대매매 등 일부 업무는 계속할수 있다.
또 고객들에 대한 에탁증권 현물 반환업무도 정상적으로 수행한다.고려증권은 자본금 1,644억원,올 상반기 위탁매매약정실적 6조2,060억원인 대형증권사로 지난해 887억원,올 상반기 392억원 등 96년 이후 누적적자규모가 1,768억원에 달하는 등 부실에 시달려왔다.
고려증권은 지난 3일 현재 단기차입금이 5,388억원에 달해 하루평균1,500억원의 상환 부담에 시달려 왔다. 특히 계열금융기관인 고려종금의영업정지로 800여억원의 자금이 묶여 심각한 자금난을 겪어왔다.재정경제원은 고려증권의 향후 처리방향과 관련해 1개월의 영업정지기간동안 자산과 부채를 실사해 정상화 여부를 결정하기로 했다.경영 정상화가 어려울 경우에는 화의 또는 법정관리를 신청하거나 파산절차를 밟게되며 이 경우 고려증권의 증권업 허가는 취소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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